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폴란드 침공 (문단 편집) ==== 폴란드 육군 ==== 무기와 장비, 병력에 있어서의 열세 또한 현격했다. 장교, 부사관들의 자질 및 병사의 훈련 자체는 괜찮은 편이었지만 상비군은 30만 명 정도였고 대부분은 예비군이었다. 현대전에 대한 지휘관들의 이해는 충실했지만 예산 부족으로 인해 그 장교들이 필요로 하는 기갑 전력이 빈약했다. 전차만 봐도 도합 2750대에 달하는 기갑 전력을 동원한 독일 육군에 비해 폴란드 육군이 보유한 전차는 1040여대에 불과했고 그마저도 575대가 [[TKS|TK-3, TKS]] 계열의 [[탱켓]]이었는데 그나마 위력적인 신형 20mm 기관포를 장착한 TKS가 존재했지만 그 수량이 24대에 불과했다. 심지어 제1차 세계 대전 당시의 무기로 구식화가 심각한 [[르노 FT]] 102대도 1선 전차 전력에 포함되어 있는 상태였다. 더욱이 일부는 연철로 제작된 훈련용 전차인 FT-17 CWS라 장갑 방어력이 사실상 없는 물건들이었다. 전체 1,040대의 전차 중에서 실제로 의미가 있던 전차 숫자는 [[7TP]] 단포탑형 110대, [[르노 R35]] 50대, [[호치키스 H35]] 3대, [[비커스 Mk. E]] 단포탑형 22대[* 전체 수량 38대 중 22대는 47mm 포 장착 단포탑형, 나머지 16대는 7.92mm 기관총 2정으로 무장한 2포탑형], 20mm 기관포 장착 [[TKS]] 24대, 경량형 자주포 TKS-D 2대[* 1937년 TKS-B 프로토타입 및 C2P 견인차의 차체를 기반으로 제작된 자주포 형식의 TKS 프로토타입. 37mm 보포스 대전차포를 무장으로 장착했다. 실제 양산에 들어가지는 않았으나 기존에 제작되어 테스트를 거친 2대는 또다른 자주포 프로토타입인 TKD 4대(연철로 제작된 TK-3 초기생산분 차체에 47mm wz.25 보병포를 장착한 모델)와 함께 제10차량화기병여단에 소속되어 1938년 뮌헨 협정 무렵 치에신 합병에 동원되었으며, 이듬해 9월 전역에서도 개전 초기 독일군을 상대로 사용되다 손실되었다. 다른 자주포 모델인 TKD는 바르샤바 방어전에 투입되었다가 손실되었다고 전해지나 아직까지 정확하게 확인된 바는 없다]를 합쳐 211대에 불과했다. 나머지는 모두 너무 구식이거나 무장과 방어력이 너무 빈약했다. 반면에 독일 육군의 실질적인 기갑 전력이라 할 만한 [[2호 전차]], [[3호 전차]], [[4호 전차]], [[35(t)]] 전차와 [[38(t)]] 전차는 합계 1,614대 정도로 단순 숫자로는 2.5배, 질적으로는 7.5배의 차이가 났다. 폴란드 육군의 야포 보유 수량은 4,300여 대였지만 이것도 독일 육군 야포 보유량[* 독일군 야포는커녕 독일군의 대공포인 8.8cm Flak 37의 보유량과 비교해봐도 차이가 별로 없었다. 이게 독일군의 "대공포" 수량이었으니...]의 절반에 못 미쳤다. || {{{#!wiki style="margin: -6px -10px"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7TP-2.jpg|width=100%]]}}} || || 폴란드 육군의 [[7TP]] [[경전차]]. 이 경전차는 차기 전차 개발기간 동안 전력 공백을 메꿀 임시방편용으로 개발된 전차였다. || 폴란드 육군의 정예 기갑 전력인 [[7TP]] 전차는 세계 최초로 디젤 엔진을 장착하고 세계 최초의 [[잠망경]]인 군들라흐 잠망경(Gundlach periscope)을 장착하는 등 그 시대 기준으로는 나름대로 혁신적인 전차였으며 상대편인 독일 육군의 [[1호 전차]]와 [[2호 전차]]를 질적으로 능가했지만 수량이 132대에 불과하여 전쟁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하기에는 터무니없이 부족했다. 7TP의 개량형인 [[9TP]][* 공식적으로는 9TP라는 명칭으로 불리지 않고 단순히 '강화형 7TP(7TP wzmocniony)'라고 불렸다.]는 침공 직전인 1939년에 이르러서야 프로토타입 제작이 계획되던 상황이었고[* 개량형 전차에 사용될 엔진 등의 테스트는 새로 제작된 프로토타입이 아니라 기존의 1766번 7TP 전차에 임시로 장착되어 1938년 5월에 시행되었다.] 그조차도 독일의 침공으로 개발 및 양산이 백지화되고 말았다. 이외에 새로운 순항전차 모델인 [[10TP]]와 14TP, 기타 20/25TP[* 정식 명칭은 아니고 당시 전차를 발주했던 여러 폴란드 회사에서 22톤, 23톤, 25톤급 등의 다양한 계획을 제출했기에 편의상 20/25톤급이라고 불렀다.]도 계획되어 있었지만 그 중 10TP만이 1938년에 와서야 프로토타입이 1대 만들어져 시운전을 거쳤을 뿐이고 또 다른 모델인 14TP는 1938년에 프로토타입 제작이 시작되었으나 1939년 9월 시점에서는 미완성이었다. 여기에 정찰용 경전차로 계획된 [[4TP]](또는 PZInż.140), 수륙양용 경전차 [[PZInż.130]] 등의 프로토타입도 1기씩 존재했지만 양산이 기각되었고 만들어 놓은 프로토타입 또한 무장이 부착되지 않은 상태라 전투에는 투입되지 못했다. 나머지는 시간 부족으로 그조차 만들지 못했다. 그 외에도 폴란드는 TKS를 기반으로 한 경량형 자주포나 대전차 자주포 모델도 개발을 진행 중이었지만 독일의 침공으로 모두 무산되었다. 그 밖에 기병여단에 배치된 [[비커스 Mk. E]] 경전차 38대와 프랑스에서 수입한 [[르노 R35]] 50대, 100대의 장갑차[* 경장갑차 wz.34 87대, wz.28 3대, 중장갑차 wz.29 우르수스(Ursus) 10대], 14대의 트럭 탑재형 자주포[* 원형은 프랑스에서 제1차 세계 대전 기간 중 개발한 물건으로 75mm mle 1897 기반 대공포를 디옹부통(De Dion-Bouton) 75CV 차체에 얹은 것이었다. 폴란드는 독립 후 전간기 시기에 14대 분량을 프랑스에게서 순차적으로 구매했는데, 폴란드군 내에서 형식명은 따로 없고 단순히 '75mm 자주포'라고 불렸으며 이 중 일부는 나중에 PF-621L 트럭 기반 차체로 바뀌었다. 이 자주대공포들은 개전 이후 독일군을 상대로 전투에 투입되어 실제로 전투기 격추 등의 전과를 거두기도 했고, 살아남은 차량은 9월 18일 루마니아 교두보를 통해 루마니아로 탈출했다.]가 있었지만 개중 일부는 부대 편성 미완 등의 문제로 인해 아예 전투에 참여하지도 못했다. 일부 기병여단들의 경우 차량화와 기계화가 어느 정도 진행되고 있었지만[* 제10차량화기병여단10.BK(mot)과 바르샤바 차량화-기갑여단 WBP-M이 대표적이다.] 전체적인 기계화는 미진하여 병력 및 물자의 수송을 말이나 수레 같은 재래식 수단에 상당 부분 의존하고 있었다. 물론 독일 역시 군 전체의 기계화가 진척되지 않아 수송의 상당 부분을 재래식 수단에 의지해야 했지만 전반적인 장비의 수준은 독일이 폴란드보다 훨씬 양호했다. 그리고 폴란드군의 소총이나 기관총, 야포 등에는 제1차 세계 대전 시절의 물건도 일부 섞여 있었다. R35 전차에 관해 첨언하자면 원래 폴란드군은 R35의 성능에 만족하지 못하고 질적으로 더 우수한 [[소뮤아 S35]]를 구입하고자 했지만 프랑스 정부가 거절하면서 결국 R35 100대를 주문하는 계약을 체결했다. 폴란드 침공이 발발했을 시점에는 이 물량의 절반인 50대와 테스트 목적으로 같이 구입한 [[호치키스 H35]] 전차 3대(차체는 H39 형식이었다는 언급이 있으나 확실치는 않다)만이 폴란드에 들어와 있었고 그나마도 후방에서 부대 편성조차 완료되지 않은 상태였다. 이 전차들은 전쟁 발발 직후 제21경전차대대에 소속된 채 폴란드 총사령부 예하 예비대로 남아있다가 9월 17일 소련군의 침공 이후 34대 분량이 루마니아 교두보를 통해 폴란드를 탈출했고, 6대는 스타니스와부프(Stanisławów. 현 우크라이나 [[이바노프란키우스크]](Іва́но-Франкі́вськ; Ivano-Frankivsk))에서 제10차량화기병여단에 새로 배속되어 그 중 3대 분량이 헝가리로 넘어갔다. 나머지 전차들은 본토에 남아 전역 말미 독일군과 소련군을 상대로 한 전투에서 소진되었다. 폴란드에 들어오지 못한 나머지 50대 R35 전차들의 행방에 대해선 확실히 밝혀진 바가 없는데 루마니아에 전달되었다가 루마니아군에 흡수되었다는 추측도 있고, 북아프리카의 튀니지로 보내졌다는 추측도 있으며, 10월경에 목적지를 바꿔 시리아로 향하여 그곳에 남아있다 종전 후 그중 일부가 [[제1차 중동전쟁]] 당시 시리아군에 의해 전투에 동원되었다는 추측도 있다. 개전 시점에서 폴란드의 기갑 병력은 2개 차량화여단, 3개 독립 경전차대대(제1, 2 경전차대대(7TP)와 제21 경전차대대(R35). 단 제21 경전차대대는 침공 발발 시점에서 부대 편성이 완료되지 않았다) 및 3개 경전차중대(FT-17), [[TKS|TK-3, TKS]] 혹은 장갑차로 구성되어 각 보병사단과 기병여단에 배치된 11개 기갑대대 및 15개 정찰전차중대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외에도 1939년 9월 독일의 침공 당시 급히 조직되어 전선에 나간 기갑 병력도 있었는데, 바르샤바 방어 사령부 예하 3개 경전차중대(중대당 전차 11대가 배속되고 각각 7TP 단일 포탑형, 7TP [[다포탑 전차|2포탑형]], TKS로 편성) 및 두브노(Dubno) 집단 소속 반(半)개 중대(R35, H35 각각 3대씩으로 편성), 그 밖에 각종 구식전차와 TKS, 장갑차로 구성된 소규모 부대가 있었다. 한편 폴란드는 16량[* 기존의 [[야전군]] 소속 장갑열차 10량과 침공 중 급조된 무장 열차 6량 합산.]의 [[장갑열차]]를 방어전에 투입하여 침략해 온 독일군을 상대로 적지 않은 전과를 올리기도 했지만[* 모크라 전투에서는 독일 기갑부대를 갈아버리는 전과를 거두기도 했다.] 폴란드 전역 말미에는 그 대부분이 파괴되었고 일부는 독일군의 손에 [[노획]]당했다. [[http://derela.pl/form.htm|개전 당시 폴란드군 기갑 전력 배치 상황은 여기를 참고.]]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